2008년 01월 21일
일본 홈 엔터테인먼트 산업의 변화와 네트워크 경제

이것도 2004년에 썼음.
정보, 지식재화의 중요성에 대한 이야기들을 처음 귀에 담게 된지는 퍽 오랜 시간이 흘렀건만 그것의 구체적인 형태나 이용방식에 대해서는 아직 뚜렷하고 확실한 미래상을 그리기가 쉽지 않은 상황이다. 이는 사실상 미래예측이 불가능하다고 보아도 과언이 아닌 현 시대에서 이 이상 더 복잡해질 시대를 예측하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거니와 그에 대한 정보 및 지식 역시 일반인에게는 거의 전무하다시피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본인은 본인의 성장기에 걸쳐 있었으며 가시적으로도 그 추이를 관찰할 수 있었던, 그리고 그 시대에 가장 큰 변화와 업계 구조의 변동이 있었던 일본의 가전 엔터테인먼트 산업, 즉 콘솔 업계의 변화와 그것이 어떠한 식으로 앞으로 다가올 시대에 어떠한 방식으로 적응해 나가려하는지에 대해 조사한 내용을 서술하고자 한다.
국내에도 쥬라기 공원의 여파가 몹시 컸던 1993년은 한일 양국에 여러 가지 의미가 있던 한해였다. 영화 한편의 순수익이 1년 치 자동차 판매 순이익 이상이라는 사실에 경악함과 동시에 문화 산업에 대한 자각과 반성이 있었으며 그에 대한 준비의 필요성이 대두된 한 해였다. 몇몇 매니아들을 통한 PC통신의 정보교류는 일본문화가 비집고 들어오던 틈을 조금씩 벌려주었고 드래곤볼, 슬램덩크 등으로 대변되는 일본만화의 침투로 한국 문화계는 오로지 만화 뿐 아니라 관련된 적잖은 부분에서 일대 지각변동을 겪어야 했다. 허둥지둥 한국형 애니메이션이니 영화산업이니 하며 엔터테인먼트 산업에 대한 재인식을 시작한 것도, 게임제작에 대한 지원과 그 가능성에 대해 눈치 챈 것도 대략 이 시기 즈음이라 볼 수 있다.
일본에서는 이 당시 엔화의 3고 현상으로 고통 받고 있었는데 그러한 와중에 터진 쥬라기 공원의 충격과 경제위기에도 불구 승승장구하는 한 기업에 대한 관심이 이에 대한 연구의 원인이 되었는데 그 기업이 바로 한국 사람들도 익히 아는 닌텐도(任天堂)였다.
당시의 안 좋던 상황은 일본 대부분 전자, 컴퓨터 업체를 도산 위기로 몰아갔었는데 오히려 94년 3월의 매출액 결산에서 게임기 제조업체인 닌텐도는 매출액 6천억엔에 순이익 1천 7백억엔으로 건재했던 점은 놀라운 일이었다. 하지만 닌텐도의 이러한 도약은 일시적, 우발적인 것이 아니었다. 실제로 닌텐도는 92년에 전자산업체 중 경상이익 1위를 차지했으며 이 때의 수치는 증권을 제외한 일본 업계 중에선 도요타, NTT의 뒤를 이어 3위에 랭크되기도 했다. 주식시장에서 닌텐도의 주식은 대 인기였으며 한 주당 배당액, 주가, 판매대금도 주식시장에서 1위를 함으로서 삼관왕을 달성하여 니혼게이자이신문 집계 우량기업 순위에서도 1위를 차지하였다.
이 당시 닌텐도의 활약이란 엄청난 것이어서, 91년 판매한 SFC(슈퍼패미컴의 약자, 닌텐도의 하드웨어 이름)의 경우는 500만대로, 일본 전체 생산한 VTR수와 맞먹을 정도였다. 현재 유수의 전자, 컴퓨터 업체들과 영화, 엔터테인먼트, 통신, 케이블TV등의 업체들이 게임업계 에 직접 진출하든지 제휴를 통한 협력을 하게끔 된 계기도, 소니의 콘솔시장에 대한 관심 증폭 또한 이 때의 현상을 바탕으로 이루어진 일이었다.
닌텐도는 여타 기업이 그렇듯 지금과는 전혀 관계가 없는 화투제작 업체에서 시작하였다. 다만 주목해야 할 점은, 아직까지도 그 중심적인 역할을 하는 ‘어떤 것’에 대한 인식이 창립 당시(1958)부터 있던 회사였다는데 있는데,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캐릭터 상품이 갖는 고부가 가치성이었다. 별 것 아닌 것 같지만 화투 뒷면에 미키마우스의 그림을 찍어 팔면 더 비싼 값에 많이 팔 수 있다는 것을 이 때부터 알았던 것이다. 더군다나 이 때의 발상에서 나온 캐릭터 상품은 이후 몇 번이고 회사가 기울어질 때마다 회생시켜줌으로서 더더욱 닌텐도는 이에 대한 확신을 갖게 되었다. 여타 콘솔 제조업체가 다 연령층으로 수요를 넓히려 하고 있음에도 여전히 유년층에 집착하며 유년 대상의 게임을 주로 다루는 이유에는 아마 이 당시에 겪은 경험이 차지하는 비중 또한 클 것이다.
위의 경상이익 실적을 통해 보듯 콘솔 시장을 가장 먼저 점령한 것은 닌텐도였다. 하지만 콘솔시장을 처음 개척하고 그것을 이익으로 연결시킨 것은 닌텐도가 아니었다. 최초의 주자로는 아타리(ATARI)라고 불리는 미국의 콘솔기기로, 이것은 조악한 화면에 불편한 조작감 등 여러모로 부족한 부분이 많았으나 게임센터에 가지 않고 집에서 똑같은 게임을 즐길 수 있다는 이유로 많은 인기를 얻었다. 그렇지만 미국과는 대조적으로 일본에서 아타리는 별다른 호응을 얻지 못했는데 그 이유로서 첫째, 일본 시장에 진입하기에 아타리는 너무 고가였으며 둘째, 일본에서는 그로 인해 아타리보다는 비교적 저가의 소위 ‘게임시계’라는 것 대체재로서 선호되고 있었던 것이다. 또한 비교적 가까운 업체인 퍼스컴 업체 역시 그다지 매력을 느끼고 있지 않았는데 사실 그 당시 게임센터의 게임은 퍼스컴에 기능을 보충하면 별다른 어려움 없이 구동 가능한 것들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런 이유에서 일본의 최초의 게임시장은 각광받는 것이 아니었다. 게임시계는 자그마치 천만대나 팔려 나갔으며 우리나라에서까지도 별 어려움 없이 이를 손목에 차고 있는 어린아이를 찾아볼 수 있었다. 여기에서 이 게임시계라는 것을 만들어낸 업체가 바로 닌텐도였다는 사실을 주시할 필요가 있다.
여타 완구업체들이 별다른 전략 없이 고가의 콘솔기판을 취급하고 있던 당시의 콘솔시장은 그 종류의 다양성으로만 평가하자면 상당했으나 판매실적은 하향세를 그림으로 인해 점차 사양산업화 되어가고 있었다. 그런 와중에 게임시계를 접고 닌텐도는 패미컴(한국명 패밀리. 앞으로 줄여서 FC로 부르기로 함)을 출시(1983)하게 되는데 당시 여타 기판과는 상이하리만큼 낮은 가격에 기판을 출시함으로서 여타 업체들의 생산비에 대한 궁금증의 대상이 되었다. 타 업체와 거의 1만 엔에 가까울 정도로까지 판매가가 차이가 날 수 있었던 것은 닌텐도의 경우, 타 업체의 완구업체적 발상에서 벗어나 처음부터 기판 자체를 판매함으로서 얻는 이윤은 그다지 기대하지 않는 대신 소프트웨어를 통한 이윤 추구를 최대한 중시하였기 때문이었다. 고가에 다량판매를 중시했던 완구업체로서는 하드웨어의 적자에 가까운 판매라는 발상 자체가 도저히 이해가 안돼는 것이었고, 거기에 더불어 하드메이커들은 보통 출시되는 어떠한 가전제품이더라도 신제품은 최적사양을 사용하고 그로 인한 고기능 실현을 중시했던 반면에 닌텐도의 경우 당시 그다지 쓰이지 않았지만 일반 프로그래머들이 사용하기 쉽고, 게임에 꼭 필요한 그래픽 구현에 가장 우수하며 저렴했던 6502CPU를 탑재함으로서 가격적인 요소를 대폭 완화시킨 것이다. 기기의 스펙 대신 그것이 어떠한 분야에서 무엇을 위해 쓰일지를 잘 알고 있었던 덕택에 이후의 가격 경쟁에서 FC는 압도적으로 유리할 수 있었으며 얼마후 터진 아타리 쇼크로 인해 5년에 걸쳐 게임업계에 홀로 남게 되는 행운을 건진다.
이러한 소프트웨어 중심의 발상은 20년이 지난 현재까지도 모든 콘솔업체들이 그대로 그 시스템을 답습하고 있으며 FC는 그 당시의 수많은 경쟁기기 중에서 가장 많은 서드 파티를 보유할 수 있게 되었다. 그에 따라 유저들의 선택은 거의 일방적인 것이었고 90년대에 도달해서야 세가의 등장으로 겨우 독점 상태가 깨지게 된다.
닌텐도는 위에서 잠시 언급한 아타리 쇼크에 대해 몹시 경계하였는데, 아타리 쇼크란 다름 아니라 아타리가 소프트웨어를 규제하고자 하는 것에 반발, 소프트업체가 소송을 걸었는데 미국의 독점거래금지법에 인해 아타리의 규제활동을 불법처리 해 버린 것이었다. 그 결과 소프트의 범람을 막을 길이 없어지고 포르노는 물론이거니와 불량품, 표지에 비해 내용이 몹시 조악한 질적으로 문제 있는 것들이 아무렇지 않게 나돌아 다님으로서 소비자에게 피해를 주고 이것이 곧 하드웨어 소비에 직결되어 아타리는 물론 관련 소프트 업체들까지 자멸해 버린 사건을 일컫는다.
처음부터 하드웨어가 아닌 소프트웨어를 중심에 둔 닌텐도로서 이것은 가장 우려되는 사태였다. 그럼에 따라 직접적으로 강력하게 소프트웨어 업체들을 규제하기 시작하였는데, 이것은 아타리 쇼크의 방지를 명목으로 소프트업체의 희생을 근간으로 하는 불평등 조약으로 귀결되게 된다.
그 조약을 들여다보자면 일단, 첫째로 닌텐도의 하드웨어를 통한 소프트웨어를 제작하려면 반드시 닌텐도와 라이센스 계약을 맺어야 하며, 둘째로 소프트웨어 회사가 개발 및 판매 가능한 타이틀은 연간 1~5개로 한정한다. 셋째로, 새 게임을 개발하더라도 1개당 수천 엔의 선금을 주고 닌텐도에 반드시 위탁생산을 해야 하며, 이렇게 생산된 소프트웨어는 또다시 생산을 의뢰한 소프트웨어 회사가 전량 구입해야 한다. 물론 그 이후 소프트회사의 반납은 일절 받지 않는다. 따라서 소프트의 흥행에 대한 부담은 소프트회사에 모두 떠넘기고, 말 그대로 중간에서 기판을 제조했다는 명목 아래 거저로 주어먹는 일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닌텐도 자체도 그 사실에 대해 거리낌 없이 ‘우리는 카세트 더빙회사나 다름없다’라고 당시를 회고하고 있다. 이 때의 질적인 제한은 물론 그 규모마저도 한정해 버리는 식의 규제는 중세시대 길드에서 찾아볼 수 있는 것이었다. 그와 동시에 선대제적 방식으로 소프트웨어 업체들을 꿰고 있음으로 인해 소프트웨어 업체들의 불만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타 기종으로 전환하고 싶어도 이미 타 회사 기판들은 전멸한 후였고, 먹고 살기 위해서는 닌텐도 외엔 아무런 선택사항이 없었던 것이다. 이러한 상황은 이후에 닌텐도에게 몹시 불리한 상황을 불러오는데, 그것마저도 자그마치 10년이 지나서야 이루어진 일이니 그 동안 닌텐도는 황금 알을 낳는 거위를 누구의 방해도 없이 말 그대로 독식하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구체적인 수치를 통해 당시 상황을 보자면, FC의 경우는 보통, 소프트웨어 한 개당 생산비 원가가 1600~1800엔이었고 이것이 닌텐도를 통해 생산되면 2600~2800엔을 소프트웨어 업체가 닌텐도에 지불해야 하는 식으로 거래가 이루어졌다. 이런 식으로 돌아가는 구조 속에서 닌텐도의 전체 영업 이익 중 70%는 위탁생산을 통해 발생하는 것이 되었다.
닌텐도는 그 나마의 기판 역시 타사에 하청을 맡김으로서 사실상 생산라인이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게임기의 프린트 기판 등 각종 부품생산은 모두 하청을 통해 이루어졌고 닌텐도 산하 공장에선 오로지 최종 조립만이 이루어졌다. 이 공장마저도 지역의 대대적인 보호 속에서 이루어졌는데, 보통 공장은 주택가에 지을 수 없음에도 닌텐도는 주택가에 공장을 지었던 것이었다. 물론 조립 뿐 만이라 공해 및 소음, 오염도 없는 것이 사실이지만 그런 것들보다 중요한 사실은 인근의 인력을 그대로 흡수해 주었다는 사실 때문일 것이다. 특히 주부들의 경우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고 가족들이 없는 시간을 공장에서 그다지 힘들지 않은 일을 하며 돈을 벌고, 그것도 마음에 드는 시간을 골라 시급제로 일할 수 있다는 사실은 지역 주민들에게 좋은 이미지를 갖게끔 하였으며 그로 인해 지속적인 유지가 가능해졌다. 주부들이 마음에 드는 시간을 골라 일해도 인력이 부족하지 않을 만큼 지역 주부들의 참여가 상당하였고, 인근에는 어떠한 공장도 허용하지 않은 시의 협조에 의해 닌텐도는 이 지역 노동력 또한 독점하다시피 할 수 있었다.
닌텐도는 이 당시부터 어렴풋하게 쌍방향 소통에 대한 개념이 있었는데, 디스크를 통해 게임의 결과를 저장하고 그것을 마을 중심의 완구점에 가서 닌텐도 본사로 송신, 전국적 게임 랭킹을 메겨 그것을 바탕으로 자신의 현 수준(?)을 알고 비교를 통해 지속적인 관심을 가질 수 있었다. 이러한 시스템에는 10만 명의 플레이어들이 참여하였는데, 80년대라는 것을 감안한다면 상당한 규모가 아닐 수 없다. 결과적으로는 닌텐도와 소프트업체의 이권문제로 흐지부지해졌지만 이러한 발상은 PS2가 발매되는 현재에도 온라인을 통해 꾸준히 계승되고 있다.
이 시기부터 독립게임 제작사(Third Party)가 등장하게 되며 그 중 Dragon Quest(이후 줄여 DQ)로 유명한 에닉스, Final Fantasy(이후 줄여 FF)로 유명한 스퀘어 또한 이 때부터 게임업계에 발을 들인 업체들이다.
그 중 FC 시절에는 에닉스의 영향력이 절대적이었는데 에닉스의 성장은 고객의 의사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그것을 반영하는 피드백 시스템에 의한 것이었다. 매년 대규모의 콘테스트를 열어 일반인들에게 아이디어를 공모하여 계속적으로 그것을 축적해왔고, 우수한 작품을 콘테스트에 제출한 경우는 아예 회사에서 출품자를 뽑아다가 프로그래머로 육성하는 식으로까지 운영되었다. 이 때 픽업된 인재들은 성장하여 아직까지도 중추인물로 남아있다.
FC가 점차 시장을 점유해 가는데 있어 닌텐도는 PC 혹은 아케이드와 FC는 확연히 다르다는 점으로서 내세울 구체적인 무언가가 필요해졌다. 이러한 고민을 통해 등장하게 된 것이 일본식 RPG로, 초기 출하량 150만장을 달성한 DQ가 바로 그것이었다. 위에서 언급한 에닉스에 의해 제작되었으며 젊으면서도 노련했던 컬럼니스트이자 시나리오 작가인 호리이 유지에 의해 야금야금 잡지를 통해 흘러나간 정보를 통해 사람들은 발매 전부터 이미 기대로 가득 차 있었고 거기에 한창 주가 상승중인 만화작가 도리야마 아키라(주요작품은 드래곤볼)가 일러스트레이터로 가담함으로서 엄청난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코인을 넣고 2~3분을 플레이하는 식의 아케이드에서는 도저히 할 수 없는 장시간, 그것도 혼자서 밖에 할 수 없는 장르의 게임이 등장하게 된 것이다. 에닉스의 젊은 스탭들은 순식간에 돈방석에 올라앉았고 이 때부터 게임 프로그래밍은 곧 일확천금의 길이라 판단한 젊은이들이 프로그래머로 직종을 대거 전환하기도 하였다.
FC는 10년 가까이 독점을 유지하였고, 2004년 현재까지도 세계에서 가장 많이 보유하고 있는 콘솔 1위의 자리를 지키고 있다. 그럭저럭 적당했던 기기의 스펙에 비해 소프트웨어의 중요성에 대한 인식이 강했던 닌텐도의 인식구조는 틀림없이 그 당시로선 옳았던 것이었다. 하지만 시대가 변하면 패러다임도 변하듯 닌텐도에게 이것은 도리어 아킬레스건이 되어 버리고 말았는데, 소프트웨어의 생산, 판매가 여전한데다 90년 들어서까지도 점유율이 상당했던 관계로 닌텐도로선 FC를 버리고 새로운 기판을 개발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던 것이다. 콘솔기기는 제작에 있어서 반도체 기술 및 정보 압축 등 최첨단 하이테크 기술이 필요하다. 따라서 이것에는 지속적인 시간과 노력, 자금이 필요한데 닌텐도는 소프트웨어를 통해 앉아서 버는 돈에 너무도 익숙해져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상황을 간파한 세가는 90년대 초에 닌텐도에 앞서서 차기종인 16비트형 콘솔을 내 놓는다. 이러한 시기적인 공백을 잘 판단한 세가의 공략은 먹혀들어가, 미국 시장에서 1년 먼저 석권함은 물론 그 해 크리스마스에는 닌텐도 콘솔에 대한 수요보다도 더 많은 수요가 집계됨으로서 승리하는 듯 보이기까지 하였다.
이 때부터 닌텐도의 독주는 끝나고, 세가와의 2파전이 시작된다.
기존의 마리오, 젤다, 별의 카비 등등 즐비한 간판 캐릭터들은 물론 서드파티까지도 구비된 닌텐도와는 달리 세가는 다른 무언가가 필요했으며 일단 닌텐도의 마리오에 대항할 새로운 간판 캐릭터가 필요했다. 주로 집에서 정적인 분위기 속에 즐길만한 게임이 많았던 닌텐도의 소프트들과 보수적인 닌텐도의 분위기, 아기자기하고 손이 간 흔적이 많은 마리오 등등에 대비하여 세가가 내 놓은 것은 소닉이라는 파란 고슴도치였다. 새로 등장한 업체로서의 신선함, 시대에 따른 빠른 변화와 기회 포착, 거기에 주로 아케이드성 게임들이 이식되었던 기판의 특징을 살린 화려함과 속도감 등등이 조합되어 만들어진 소닉은 마리오와는 또 다른 매력을 안겨줌으로서 많은 유저들을 세가로 이동하게끔 하였다. ‘속도감 있고 화려한 게임’의 존재는 여태껏 없지는 않았으나 당시 최고의 기술력과 노력이 투입된 소닉 만큼의 완성도를 갖춘 작품은 없었던 것으로 미루어 세가가 얼마만큼 닌텐도와의 전쟁에 신경을 곤두세웠는지는 쉽게 추측할 수 있다.
닌텐도의 차기작인 슈퍼패미컴(이후 줄여서 SFC)과 세가의 전쟁은 그다지 오래가지 않아 세가에 먼저 한계가 찾아왔는데 이 역시 이전의 아타리 등등과의 경쟁에서와 마찬가지로 서드파티로 인해 발생한 것이었다. 닌텐도의 경우는 여전히 고압적인 자세를 유지하고 있음에도 서드파티들이 이탈하지 않았던데 비해 세가의 경우는 게임소프트 제작을 자사와 관련이 있는 업체에게만 허용함으로서 결국 시간이 갈수록 불리해지기 마련이었던 것이다. 게다가 당시 시대적인 대세인 RPG를 제작할 만큼의 서드파티가 세가에 없었던 것이 불운이라 할 수 있다.
SFC의 경우는 당시의 양대 산맥이라 할 수 있는 RPG 게임의 메이커인 스퀘어와 에닉스 양측을 모두 서드파티로 두고 있었던데다, 90년대는 80년대 최전성기였던 에닉스의 바통을 물려받은 스퀘어가 대활약을 하던 시기였다. 본래 Dragon Quest의 모방작으로 시작한 Final Fantasy가 16비트 시대로 들어옴에 따라 엄청난 기술적 발전을 보였고, 여태껏 쌓인 노하우를 바탕으로 소위 명작으로 일컬어지는 작품들을 대량으로 제작하여 동시대 발매하는 세가의 타이틀들에 비해 우위를 점하는 킬러 타이틀 제작사 역할을 톡톡히 하였다.
게다가 한 시대를 풍미했다고까지 불려지는 스트리트 파이터2가 SFC를 통해 발매되었다고 하는 점은 닌텐도에게 많은 이점을 안겨주었다. 이러한 서드파티와 킬러타이틀의 중요성에 대해 인식하게 된 여타 콘솔시장 진입의 의사를 지닌 업체들은 16비트형 콘솔의 시대가 끝나고 32비트형 콘솔로 옮겨가는 시기에 기민하게 움직이기 시작한다.
이 시대에 처음으로 수면 위로 부상한 업체는 다름 아닌 소니였다. 소니는 SFC 기판 제작, 그것도 사운드 칩을 비롯한 중요부품들을 주로 담당하여 생산하고 있었는데 앞으로 다가올 멀티미디어 시대의 전략 중 한가지로서 게임기 시장의 진입을 꾀하였고 그로 인해 닌텐도와의 제휴를 모색한 것이었다. 소니의 계획은 그저 제휴가 아닌 닌텐도가 여태까지 쌓아온 자산들, 즉 제품 개발 노하우와 구축된 판매망을 고스란히 손에 넣는 것이었다.
그러한 소니의 움직임과 반대로 닌텐도의 시장 지배력에 대한 오산은 그때까지도 계속되고 있었는데, CD-ROM 콘솔로 옮겨가는 과정에서 그것은 또 한번 드러나게 된다. 세가가 90년대 초에 이미 롬 카트리지 기판과 CD-ROM을 연동시킨 메가드라이브(이후 줄여 MD)를 발매한 것과 달리 닌텐도는 개발에 대한 기획을 마치고 소니와 함께 발매할 것을 공석에서 예고까지 하였지만 결국 뜻대로 되지 않고 되려 소니와 마찰함으로서 시기를 늦추게 된다.
소니와 닌텐도의 마찰은 앞으로의 주도권을 염두 해 둔 것으로 그 성격을 규정지을 수 있는데, CD가 앞으로의 주 매체가 될 것임을 인식한 닌텐도가 소니와 제휴하기로 한 이후에 CD-ROM 플레이어를 통해 구동되는 소프트웨어의 관련 권한을 소니에게 넘겨주기로 한 것을 철회함으로서 벌어진 일이다. 소니에게 권한이 가면, 닌텐도 기반 서드파티가 CD-ROM 기반 게임을 개발하기 위해 소니에 개발계획안을 제출해야 하고, 그렇게 되면 소니는 그 바닥의 동향을 파악함으로서 오히려 서브플랫폼 제작 업체인 소니가 플랫폼홀더인 닌텐도를 앞지를 가능성조차도 있는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소니의 전자제품 제조기술에 대한 평판은 이미 검증된 것이어서 닌텐도의 부담은 더더욱 가중되었다.
따라서 닌텐도는 ‘어느 날 갑자기’ CD-ROM 제휴업체를 바꾸겠다고 공표해 버린다. SFC와 일체형으로 제작되는 CD-ROM 플레이어만을 소니에 맡기고, 앞으로의 가능성에 있어서 더 가치있는 접속형 CD-ROM 플레이어를 따로 필립스에 의뢰해 버린 것이다. 게다가 접속형과 일체형 CD-ROM은 서로 호환되지 않는 식으로 제작하기로 결정하였다.
당연히 소니의 반발이 뒤이어졌고, 닌텐도는 소니와 타협하는 대신 CD-ROM을 통한 소프트웨어 관련 권한을 여전히 닌텐도 영향아래 두기로하고 소니는 오로지 기기 생산만을 담당하기로 하는 계약을 맺는다. 소니는 이러한 굴욕적인 계약을 맺음과 동시에 자사의 전략 및 의도까지 모두 시장에 공개되어 버림으로서 많은 타격을 받는다. 소니 내부에서는 이 때부터 콘솔업계 진입에 대해 독립인가, 포기인가를 놓고 논란을 벌이다가 결국 소니는 93년 말에 Sony Computer Entertainment(이후 줄여서 SCE)를 설립한다.
이것이 16비트에서 32비트로 콘솔이 이동하던 시기에 있던 사건으로, 94년 말에 드디어 소니의 CD-ROM 콘솔 Play Station(이후 줄여서 PS)이 등장함으로서 경쟁은 격화되어 간다.
이 당시 소니의 전략은 그저 게임업계에서 우위를 차지하는 것만이 아니었다. 이미 미국의 CBS 레코드사를 소유하고 있었고, 89년에는 메이저 영화사중 하나인 콜럼비아 픽쳐스까지 매입함으로서 음악 영상 양면에서 소프트웨어 분야를 확대해 오는 중이었던 것이다. 소니는 하나의 오리지널 캐릭터에서 파생되는 여러 가지 상품을 만드는 것이 가능하다는 소프트웨어의 특징을 미리 파악하고 이것이야말로 캐릭터 상품, 비디오, Tv 등등으로 아무리 사용하여도 줄어들지 않는 최고의 상품이라는 인식을 갖고 있었다. 따라서 이미 시장지배력을 지닌 닌텐도와의 제휴를 통해 CD-ROM 소프트를 보급하면 영화, 게임, 하드웨어 등 전시장 석권이 가능하다고 보았다. 즉, 여태까지 이루어진 하드웨어적 기반을 소프트웨어를 통해 연계시키는 사업의 마지막 남은 한 점을 찍기 위해 콘솔업계 진출을 꾀한 것이었다.
이처럼 CD-ROM에 당시의 게임업체가 혈안이었던 것은 앞으로의 멀티미디어 시대의 돌파구는 CD-ROM이 되리란 생각에 의한 것이었다. CD-ROM은 당시의 카트리지에 비해 압도적으로 우월한 몇 가지 요소들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는 첫째로 CD-ROM은 CD와 마찬가지로 플라스틱이 재질의 프레스 제품으로서 기존의 카세트식(롬팩) 게임 소프트웨어에 비해 제작비가 훨씬 적다는 점이었다. FC, MD용의 게임소프트웨어는 롬 팩이라 불리는데, 이 방식으로 반도체 기판을 만들려면 한장당 1200엔 가량이 드는데 비해 CD-ROM은 플라스틱 판이므로 원가는 장당 수백엔 밖에 하지 않았으며 대량생산 할수록 단가가 낮아진다는 장점이 있었다. 둘째로 CD-ROM의 장점은 카세트 게임기가 많아봤자 10~20M의 저장용량을 가지고 있던 것에 비해 500M 이상의 기억용량 가지고 있다는 점이었다. 셋째로는 유통에서의 절대적 우월성을 띄는 것인데 이것은 이후에 언급하고자 한다.
하지만 이러한 CD-ROM 또한 단점이 존재했는데, 반드시 전용 플레이어가 필요한 관계로 콘솔의 가격 자체가 고가화 하는 것이 불가피하였으며 초기에는 게임기에 별도 장착함으로서 구동되었던 관계로 외부장치인 플레이어가 본체에 연결되어야 하는 불편함이 있었다. 이후에 완전히 CD-ROM 전용 콘솔로 전환됨에 따라 이러한 문제들은 적잖이 해결되었으나, 그럼에도 카트리지에선 없던 CD 특유의 튐 현상 및 로딩의 문제가 여전히 남아 있었다.
또한, CD-ROM은 규모의 경제가 존재하지만 제조설비 자체에 거액의 설비투자를 필요시 하였다. 따라서 그럴 정도의 자본력이 없으면 대기업 산하에 들어가 개발할 수밖에 없게 되었고 그로 인해 과거처럼 단칸방에서 소프트웨어 회사를 창립하는 것은 불가능한 것으로 인식하게끔 되었다. PS1이 처음 등장하여 중반부까지 이러한 인식은 좀처럼 가시지 않았다.
롬 카트리지 방식의 SFC 시절에는 FC 시절엔 3800엔 정도였던 소프트웨어의 가격이 9800엔으로 폭증하는 현상을 보였는데 이는 게임 스케일이 기판의 성능 상승으로 인해 덩달아 커짐에 따라 사용하는 반도체의 용량이 증가하였고 그에 따른 제작비 또한 급증함으로 인해 일어난 현상이었다. 이러한 현상은 계속되어 SFC 시절 후반에는 가격이 1만 엔을 넘는 소프트를 찾는 것은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게 되었다.
32비트 콘솔 시장이 형성되었을 당시, 초반에는 세가에서 발매한 기기인 새턴이 선두를 유지하였다. 16비트 시장에서의 패배를 만회하기 위해 이번에는 좀 더 많은 보완책을 들고 나왔는데, 자사의 콘솔을 사용하던 유저들이 성장하였음을 감안해서 그들을 위해 성인용 소프트웨어의 개발을 공인하였고, 유저의 다양화를 위해 어린이만을 주축으로 고려하지 않고 전 연령을 유저로서 포섭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였다. 그 당시의 노력은 상당한 것이어서 90년대 초중반 한국에까지 퍼진 성인용 게임 ‘동급생’의 제작사인 엘프까지도 영입하는 등 이전의 서드파티 부족으로 인한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 세가는 동분서주하였다.
이에 비해 초기의 SCE는 겨우 궁색이나 맞추며 따라가는 정도였다. 새턴의 히트작이 발매될 때마다 비슷한 소프트를 급조해서 새턴이 완전한 시장 지배력을 갖추는 것을 막는데 급급할 정도로 SCE는 타이틀 부재에 시달렸다. 이전의 실패에도 불구 여전히 아케이드 위주였던 세가는 일단 아케이드에서 흥행한 소프트들을 콘솔로 이식함으로서 초반의 기선 제압에서 SCE를 누를 수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는 동시에 여전히 게임기만을 위한 타이틀 부족이 부족하고 아케이드 중심이라는 소프트의 다양성의 한계를 노출시켰는데, 이는 초반의 공세가 끝나고 중장기적 입장에서 보았을 때는 몹시 불리한 것이었다. 이는 여전히 세가가 중량감 있는 서드파티 영입에 실패했다는 반증이기도 했던 것이다.
95년, SCE에 마땅한 타이틀이 없던 시절, ‘아크 더 래드’라는 소프트가 등장하였는데 이는 스퀘어에서 하청을 받던 회사(G크래프트)가 독립하여 발표한 첫 작품이자 PS 최초의 정식 RPG로서 의의가 큰 작품이었다. ‘하청업체의 대두’라는 사건은 이전까지 제작비 급증에 의한 대기업 의존식의 생산 구조를 어느 정도 탈피하였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것이었고 SCE로서는 드디어 세가에 대해 반격다운 반격을 한 사건이었던 것이다. 아크 더 래드는 사실 많은 단점을 갖고 있는 소프트였는데, 일단 급한 상황이었던 SCE의 상황이 고려된 관계로 급조된 경향이 있었다. 따라서 보통 RPG의 경우 25~40시간이 걸리는데 비해 아크 더 래드의 경우는 숙련자의 경우, 고작 5시간만으로도 클리어가 가능할 정도로 짧은 플레이 시간을 가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신기종이 출시되었을 경우, 초기에는 게임성 자체보다는 비쥬얼 적인 요소들이 주로 관심사가 되는 만큼, PS의 기능을 활용한 아크 더 래드는 상당한 호응을 얻게 되었고, 그로인해 이후에도 지속적인 시리즈가 발매됨으로서 현재(PS2)까지도 그 인기가 이어지고 있는 중이다.
소니와 세가의 혼전은 1997년 스퀘어의 ‘Final Fantasy7’이 세가에 치명타를 입히는 킬러타이틀로서의 역할을 완수함에 따라 일단락된다. 이 때부터 스퀘어는 소프트웨어 업체를 한낮 종속된 회사가 아닌 한 기판의 미래를 좌지우지하는 역할을 맡고 있는 것으로 인식시켰고 그로 인한 소프트업체의 위상 상승에 기여하였다. 시대적인 조류가 변하더라도 장기적인 승부는 결국 중반부터 등장하는 RPG같은 중량감 있는 타이틀을 통해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간파한 MS가 X-Box의 출시에 앞서 가장 먼저 스퀘어와 물밑 교섭을 벌인 이유는 이러한 영향력에 대한 인식 탓일 것이다.
위에서 언급하였듯 소니는 닌텐도에 의해 위기를 겪게 되었는데, 그것을 극복하고 16비트에서 32비트로 넘어가는 과정에서 닌텐도에 반기를 든 서드파티 혹은 중소규모의 게임 제작사들을 대거 영입하고 그들의 게임을 직접 매입한 후, 자신들의 유통 과정에서 자사 광고와 함께 반드시 중소 제작사들의 타이틀도 함께 광고를 했다.
이러한 중소규모 제작사 육성책 덕분에 이 때부터 상당한 실력을 가진 중소기업들이 등장하게 되며, 이러한 중소기업들은 대형 기업에서 소속되어 있던 팀이 분리되어 나와 기업을 차린 경우 또는 하청생산으로 인해 실질적인 제작사나 다름없던 경우가 많았던 관계로 시작부터 SCE는 타 업체에 비해 유리한 기반을 가지고 출발하게 된다.
소니의 중소기업 육성책은 SCE를 전폭적으로 중소기업이 신뢰하게끔 하였고, 평소 불만이 가득했던 닌텐도 소속의 서드파티들이 대거 이탈한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결과적으로 닌텐도는 CD-ROM에서 시작한 소니와의 주도권 싸움에서 완패하였고, SCE는 그러한 상황 위에 비슷한 입장의 업체들을 대량으로 끌어들임으로서 타이틀 확보한 것이다.
물론 이렇게 끌어들인 업체들은 당장에 타이틀을 다량으로 발매하기엔 무리가 있었고 결국 중장기적 입장을 취할 수밖에 없게끔 된 것이었다.
소니는 닌텐도로부터 이외에도 많은 것들을 가져왔는데, 하드웨어 자체의 쓸모없는 고성능화로 인해 가격이 올라가는 것을 방지하는 것 또한 닌텐도의 노하우였다. 세가 새턴의 CPU가 복잡한 구조를 가짐으로 인해 게임 제작에 꽤 높은 숙련 프로그래머가 필요했음에 비해 소니는 상대적으로 단순한 구조를 택함으로서 중소기업에서 또다시 소니 쪽을 선호하게 되었다. 이후에 이런 전략과 중소기업 육성책이 정확하게 맞아 떨어져 중반 이후부터는 우수한 소프트들의 적잖은 수가 중소기업으로부터 등장하였으며, 중소기업이기 때문에 가능했던 기발한 발상의 것들(비시바시 스페셜 등) 또한 등장하게끔 된다.
여기에다 소니 특유의 노하우가 결합되어 소니를 중심으로 유통혁신이 일어났는데, 당시 인기 타이틀이 카트리지 시절의 경우는 1만엔을 상회한데 비해 소니는 고작 5800엔으로 그 가격을 고정시켜 버린 것이었다. 세가는 선공의 목적으로 숙고한 끝에 7800엔으로 가격을 고정하여 서둘러 먼저 발표했다가 오히려 뒤통수를 맞고 재조정하게까지 될 만큼 이 가격은 파격적이었는데 이러한 가격 인하에는 첫째, 도매상을 거치지 않은 소매상과 직접적 거래가 큰 역할을 하였다. 편의점에 소프트가 배치되기 시작한 것도 이 때부터였다. 두 번째로는 대량발주가 아닌 비교적 소량 반복생산을 통해 재고를 줄일 수 있었다는 점이다. 세 번째로는 제작이 간편한 CD의 경우 소매점에서 추가 주문이 들어오면 4일 내에 재생산하여 출하가 가능했다는 점이다.
이는 다름아닌 소니뮤직을 통해 축적된 소니만의 CD 생산 및 판매의 노하우였는데 이것이 콘솔시장에서도 그대로 적용된 것이었다. CD 타이틀은 제작이 간편하므로 수요에 맞추어 재생산이 가능한데다 매진이 임박할 경우 혹은 매진되었을 때 이미 소매상을 통한 정보가 본사로 들어옴으로서 충분한 대처가 가능했던 것이다. 따라서 재고물량이 없는 관계로 소매시장에서 가격 인하를 방지할 수 있었다. 소니의 이러한 관리방식은 여태까지 존재했던 대중화에 성공한 콘솔 중 유일하게 잔량 소프트를 구할 수 없는 현 상황으로 미루어 몹시 효율적이었던 것이었다고 볼 수 있다.
또한 타사의 아이디어를 적극 수용함으로서 콘솔업계 초보인 만큼 개발이 늦고 콘솔관련 노하우가 부족한 점을 커버하고, 그 위에 오히려 하드웨어적 노하우를 살려 재빠른 대처를 함으로서 같은 제품을 본래 계획하던 회사에 비해 더 빨리 출시하는 식의 전략을 보여주었다.
단적인 희생양으로 또다시 닌텐도가 말려들었는데, 닌텐도가 게임 쇼를 통해 조이패드에 스틱을 부착한다는 아이디어를 밝히자 소니는 그것을 보자마자 개발에 착수, 바로 모방하여 먼저 시장에 내놓아버린 것이었다. 닌텐도가 이후에 또다시 진동팩을 통한 바이브레이션 기능이 추가된 진동패드를 공개하자 소니는 듀얼쇼크라는 이름으로 다시 한번 시장에 먼저 출시해 버렸다. 특별한 제제가 없는 아이디어 상품을 공개적으로 드러낸 닌텐도는 결국 SCE에 무상으로 아이디어만 공개한 꼴이 되고 만 것이다. 위의 사건은 당시에도 워낙 당황스러운 일이라 비공개로 두 기업 사이의 밀약이 오갔다는 식의 루머가 많았으나 타사의 이익을 위해 중요 차기제품에 관련된 아이디어를 무상으로 제공할 이유가 과연 있었을까. 닌텐도는 아무것도 건지지 못했던 당시 상황으로 미루어 이는 그저 지식의 독점을 가장 중시하던 닌텐도가 저지른 일종의 황당하고도 아이러니한 해프닝이었던 것이다.
한편 생뚱맞게도 닌텐도는 시대 대세에 맞지 않게 여전히 롬 카트리지를 고수하고 있었다.
용량은 물론이거니와 비용적으로도 이미 시대에 뒤떨어진데다 음성의 추가가 곤란한 관계로 연출성이 크게 떨어질 수밖에 없었고 당시 시대적으로 붐이었던 동영상에 대한 수요 또한 전혀 충족시킬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따라서 닌텐도는 이 때부터 서서히 전면전에서 부각되기보다는 틈새를 공략하게 된다. 이 당시의 닌텐도 64의 경우는 현재에 비해 비교적 다방면의 소프트웨어를 발매하는 양상을 보였으나 점차적으로 그 한계를 인식하고 오로지 캐릭터 중심의 소프트 개발에 힘을 기울인다. 이 때에 등장해서 전세계 어린이들을 열광시킨 포켓몬스터는 이러한 사정을 반영하는 산출물이었으며, 포켓몬스터를 통해 닌텐도는 게임 외의 영역은 물론이거니와 어린이들에게 어필하기 위해선 기능이 몹시 떨어지더라도 휴대가 간편하고 경제적 부담이 적은 휴대용 게임기 시장의 개척이 필요함을 절감하게 된다. 따라서 닌텐도의 소프트웨어는 오히려 주력기기인 닌텐도64보다도 휴대용 게임기를 통해 더 많이 발매되게 되었으며 그 중 적지 않은 수가 포켓몬스터, 마리오, 젤다 등등 이전의 캐릭터를 응용한 상품의 계속적인 반복과 다름없는 것들이었다.
SCE가 주도권을 잡은 콘솔시장은 소프트웨어 업체들 또한 전성기를 구가하던 시기였는데, 대표적인 경우가 FF시리즈로 유명한 스퀘어였다. 편의점의 유통권까지도 SCE로부터 넘겨받은 스퀘어소프트는 계속되는 소프트웨어의 히트로 인해 상당량의 자본축적이 가능해진다.
이 때부터 스퀘어는 점차적으로 그 규모가 커져감에 따라 타사의 제작팀 인재들을 마구잡이로 대거 스카웃하는 행위 등으로 업계의 빈축을 샀고, 그 결과 타사의 히트작에 자사의 색깔을 덧씌워 그대로 발매하는 식의 개발도 적지 않게 이루어졌었다.
스퀘어소프트의 대작 FF7은 소프트만의 성공 이외에도 PS 자체의 향보를 바꾸어 놓았다는데 의의가 있다. 이전까지는 일본 내에서만 인정받던 일본식 RPG가 세련된 3D 영상을 통해 구현됨으로서 유럽 및 미주에서도 상당한 관심을 갖게 됨에 따라 PS의 판매율이 급증하였고, 스퀘어는 3D 기술의 진보와 대용량화 된 소프트의 용량이라는 상황을 적절히 맞물려 적용시킴으로서 이후 소프트업계의 생산방식에 하나의 기준으로서의 틀을 제시했다고 볼 수 있다. 또한 공들여 만든 동영상 하나만으로도 게임정보지를 통해 발매 전부터 많은 이들의 관심을 불러일으킬 수도 있는 것이었고 그로 인해 대대적인 홍보에 따르는 부담을 비교적 줄일 수 있었다.
스퀘어는 점차적으로 그 활동 영역을 소프트시장 바깥으로 확대해 나갔는데, 이전까지와 마찬가지로 타이틀 발매와 동시에 가이드북, 문고판 서적, OST 등을 동시 발매하는 등의 활동에서 그치지 않고 축적된 컴퓨터그래픽 기술과 자본금 등을 투자하고 소프트업체 중에선 소위 명품브랜드로 통하는 자사의 네임밸류를 적극 활용, 아예 완전 3D로만 구성된 영화를 기획한다. 이러한 계획은 실제로 이루어져 몇 년 전 Final Fantasy라는 순수 3D 영화로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나 별다른 호응도 얻지 못하고 오히려 엄청난 투자액으로 인한 부채의 압박으로 부도 위기로까지 내몰리게 된다. 이 때 구제를 명목으로 개입한 소니는 스퀘어의 주식을 대량 매입하고 대주주가 됨으로서 또다시 소프트웨어업체가 하드웨어업체에 종속당하게 되어 버리는 사태를 초래하였다.
이윤추구보다는 창작욕구가 우선시되었던 소프트웨어 업체로서의 스퀘어가 아닌 이윤추구가 주 목적이 되는 업체로 전락한 스퀘어는 그 후 확실하게 돈 되는 상품이 아니면 결코 도전하지 않는다든가, 과거에 흥행했던 소프트 및 캐릭터를 리메이크하는 등의 소극적 활동으로 최근 들어 많은 지지층이 이탈한 상태이다. 물론 그 규모에 있어서도 조정이 있었는데, 특히 이전에 끌어들였던 각계각사의 스탭들이 대거 이탈하여 타사에 영입되든가 독립함으로서 이전작의 후속편을 독립회사를 통해 발매함에 따라 이후 PS2에서 발매되는 타이틀들은 타이틀 자체는 이미 이전에 한번 흥행했던 작품의 후속편이기에 익숙하나 제작사가 생소한 경우가 눈에 띌 정도로 많아지게 되었다. PS 첫 등장시에 대두된 중소업체의 도약과 대형제작사의 자멸로 인해 PS 말기에는 신생 중소업체가 상당수를 이루었으며 아타리 시절의 조잡스럽고 양적으로만 우월했던 것과는 달리 우수하고 아이디어 있는 소형 제작사들이 우후죽순으로 생겨나, 이때에 발생한 제작사들은 이후의 PS2에서까지 그 활동을 이어가게 된다.
대표적으로 이 때에 도약한 소형 제작사로는 니혼이치 소프트를 들 수 있는데, 이들은 적은 자본금(490만엔)으로 회사를 시작하여 근근이 하청 및 자잘한 다른 사업까지 동행하며 명맥을 이어오다가 PS 시절에 와서 ‘마알왕국의 인형공주’라는 아기자기한 동화 같은 게임으로 히트를 치게 되는데, 이 때의 참여 스탭 수는 손에 꼽힐 정도였다. 스퀘어나 여타 대형 제조사의 세세하고 정밀한 시스템과는 달리 몹시 간단한 구조에 낮은 난이도, 짧은 플레이 시간 및 독특한 캐릭터를 특징으로 하는 이런 식의 게임들의 등장은 유저들에게 있어 신선하게 받아들여졌고, 투자비용의 부담으로부터도 대형 제작사들에 비해 상당히 자유로울 수 있었다. 게다가 대형 제작사의 히트작이 채용한 시스템을 약간 간략화하여 채용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예를 들자면 스퀘어의 히트작 FFT(Final Fantasy Tactics)에서 선보인 리얼타임시뮬레이션이라는 상당한 노하우가 축적된 시스템은 소형사에게는 똑같은 재현이 무리였던 관계로 몹시 간략화 되고 그것의 가시적 형태만을 빌려오게끔 하였는데, 예를 들어 ‘플라이트 플랜’같은 업체들은 이러한 과정을 통해 시스템 상의 모방을 시도하고 그로인한 구조적인 허술함을 캐릭터 및 부가적 요소들로 커버함으로서 핸디캡을 줄일 수 있었다. 많은 시간과 노력이 소모되는 시스템 개발의 몫은 대형제조사에 의한 것이었지만 그것과 비슷한 어떤 것을 차용함에 따른 어떠한 대가도 지불할 필요가 없었거니와 캐릭터를 전면에 부각시켜 그것으로 게임을 이끌어가기엔 오히려 시장의 시선이나 기대 및 투자(대형업체는 주식회사였으므로 대주주의 허가가 없으면 소프트의 개발이 불가능) 등을 고려하면 작은 업체가 유리한 부분 또한 틀림없이 존재하였다. 특히, 위에서 언급한 플라이트 플랜의 경우는 90년대 초 국내에까지도 엄청난 사회적 반향을 미쳤던 ‘동급생’의 실질적 제작사로, 캐릭터를 생명으로 하는 성인용 소프트웨어의 제작 경험 등으로 미루어 그 분야에서는 이미 상당한 노하우가 갖추어진 셈이었던 것이다.
이런 식으로 만들어진 게임들은 거기에서 그치지 않고 지속적으로 같은 시스템에 캐릭터만을 바꾸고 시대에 맞춰 적당한 그래픽 수준을 갖춘 후 발매하는 것만으로도 지속적인 인기를 유지할 수 있었다. 게다가 캐릭터가 전면에 내세워진 작품들이었던 만큼 라이트 유저들에게 다가가기도 쉬웠을 뿐더러 플레이 전후에 이어지는 관련 상품의 제조 및 판매에서도 그렇지 않은 경우에 비해 수월할 수 있었다. 다양한 시도를 하는 대형 제작사에 비해 한우물만 파는 것이 오히려 장점으로 부각되어 ‘이 회사 작품은 대강 이런 성격의 작품’이라는 식의 인식이 유저들에게 전반적으로 퍼져 일종의 브랜드가치까지 형성하는 경우까지 생겨났다. 후속편이 발매됨에 따라 보통은 같은 일러스트레이터를 채용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는데, 재미나는 것은 차기작이 등장하기까지의 기간 동안에 전속 일러스트레이터들도 계속적인 성장을 함으로서 캐릭터의 가치를 높이는데 많은 도움이 되었다는데 있다. 일러스트레이터들은 유명인사가 채용되는 경우도 많았지만 소형제작사의 경우는 비용을 고려해 소위 ‘동인지 시장’에서 잘 나가는 작가들을 영입하는 경우도 있었으며, 인터넷이 일반화된 이후부터는 그림 게시판 및 그쪽 업계 관련자들의 링크를 통해 프로는 아니지만 아마추어라고 부르기에는 실력이 좋은 반쯤은 오타쿠 성향을 띄는 사람들을 채용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런 식으로 형성된 캐릭터들은 그 작품 내부에서만 활동하지 않았다. 한 캐릭터가 생겨나면 그 캐릭터의 인기비결을 분석해 겉모습은 틀리지만 어딘가 비슷한 이미지의 캐릭터를 만들어 내던가 아니면 특징이 되는 특정 아이템[안경, 특정복장(..)] 등을 사용하여 타사 또한 적극적으로 그것을 응용하여 다른 캐릭터를 만들어 내었다. 이러한 식의 발상은 어쩌면 소유권이나 저작권과도 마찰을 일으킬 수 있는 것이지만 일본 내부의 문화적 자본이 워낙에 풍부하므로 딱 집어 이것이 이렇다고 말할 수도 없는데다, 엄청나게 발달한 성인물 시장(소프트, 만화, 비디오 등)을 중심으로 여태까지 일종의 관례나 마찬지로 행해지던 것이라 이제와 딱 잘라 문제된다고 말할 수도 없는 것이었다. 성인물 시장은 부정적인 이미지와는 달리 일본 사회의 유행을 가장 빠르고 정확하게 집어내는 역할을 하는 곳인데, 어마어마하게 많은 제작물들 중에서 수요자에게 한 눈에 띄어야 하므로 단순 캐릭터 창출(특히 여성)에 한해서는 거의 세계 최첨단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실제로 성인용 소프트 업체인 리프는 To Heart라는 소프트를 통해 서적, PC, 콘솔, 피규어, T셔츠, 침구 등 다방면에 걸쳐 상당한 수입을 거두었고 그 여파가 한국에까지 몰려와 4인조 아이돌 그룹 핑클이 바로 그 성인용 소프트에 등장하는 캐릭터가 그려진 T셔츠를 단체로 입고 등장하여 ‘알고 있는’ 사람들을 경악시킨 일까지 있었다. 아직까지도 인기가 완전히 시들지 않은 관계로 최근에 애니메이션으로만 두 번째로 제작되었으며 국내 모바일 업체에서도 계약, 모바일 게임으로 공급되고 있기도 하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은 이전부터 존재하던 것이었으나, 인터넷의 등장은 그것을 더 광범위하고 직접적으로 사람들에게 다가가게끔 하였다. 즉, 특정 잡지 혹은 주위 또래를 통해 받던 정보를 직접적으로 제작자에게서 받을 수 있게 됨으로서 2차적인 가공이 되지 않은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목격할 수 있게 되었으며 그 범위 또한 넓어짐에 따라 비교 및 선택의 폭이 상당히 넓어질 수 있었다. 남들이 몇 년에 걸쳐 정리해 놓은 그 바닥의 정보를 게시물을 통해 단 몇 분 만에 습득해 버림으로서 지식의 순환 속도 상승은 물론, 관련 문제점 지적 및 개선점에 대한 토론을 통해 개인에 의한 사고로 결과를 내던 시절에 비해 월등하리만큼 빠르고 정확하고 또한 독선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의견수렴이 가능해 진 것이다. 일본에서 가장 먼저 2ch같은 초대형의 각 분야별 게시판이 군집을 이룬 사이트가 발달할 수 있었던 이유도 위와 같이 거대화된 시장 속에서 정보교류가 시급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수많은 사람이 모이다보니 평소엔 묻혀있던 특별난 재주를 가지고 있던 사람들이 종종 눈에 띄게 되었는데, 그 중에는 유달리 모방 및 창작욕구가 강한 사람들이 있었으며 그들은 계속적으로 눈에 들어오는 타인의 수작들을 보며 직접 자신의 손으로 만들어보고자 하는 노력을 기울였다. 그 결과 일반 아마추어인 30대 회사원 아저씨가 만들어낸 캐릭터가 2000년 초에 상당한 인기를 구가하였으며, 최근에는 MS의 각 OS별로 그 OS의 특성을 살린 캐릭터를 만들어 내고 그것을 현실 속에서 구현화시켜 상품화하는 등의 행보를 보이고 있다.
이들의 공통적인 특징이자 강점은 경합성은 물론, 배제성마저도 전혀 없다는데 있다. 어느 개인의 아이디어에 의해 완성된 특정한 캐릭터가 마음에 들면 그것을 자신이 가져다 약간씩 고치고, 그것을 또 다른 사람이 같은 방식으로 덧붙이는 행위가 계속됨에 따라 캐릭터는 점점 형태가 완성되어가고, 이것을 또 현실 속에서 상품화시켜 나가는 것이다. 물론 특정 스폰서가 없이 개인들의 모임에 의한 수준이지만 그 참여도나 창작의욕으로 인해 형성되는 그 사회의 전반적 문화자본은 장기적으로 봤을 때 상당히 유리하게 작용될 것임엔 틀림없다. 보기만 하는 것과 직접 그리고 만들어 보는 것은 확연히 틀리지 않겠는가.
특히 이런 부분이 잘 나타나는 것은 통칭 AA(아스키 아트)로 불려지는, 점과 선을 통해 그림을 만들어낸 후 플래쉬 애니메이션으로 그것을 활용하는 분야인데 개개인이 고민해서 만들어 낸 특정 모양의 캐릭터, 동작, 지도 등등을 공동으로 모두 사용함으로서 플래쉬 애니메이션의 재료가 늘어나고, 그로인해 자신이 만들어 내는 작품의 수준 역시 상승하는 긍정적인 효과가 수반되는 것이다. {이들의 전성기는 독도논쟁으로 한창 시끄럽던 올해 초 쯤 이었으며 그 이후 위니(일본의 공유프로그램) 개발자 구속사건 및 온라인에서의 저작권 문제로 인해 잠시 주춤한 상태이다. 이들이 최초에 국내에 알려진 것은 일본문화에 도취된 몇몇 사람들을 통해서였지만 본격적인 계기는 독도-죽도 전쟁으로 일컬어지는 한일 네티즌 설전을 통해서였다. 이 사건(?)은 국내 언론사를 통해서도 기사화 되었고 한국의 대표로는 짱공유(와레즈의 한국형 변형 사이트) 대표가, 일본 쪽에서는 2ch의 운영진이 참여하였다}
이러한 와중에 국내에서는 과연 홈 엔터테인먼트, 즉 게임기 산업에 대해 어떠한 시선을 갖고 있었을까.
한국에서 콘솔산업이 위상을 차지하는데 가장 큰 역할을 담당했던 사건을 본인의 주관적 판단을 통해 밝히자면 1999년 빌 게이츠의 X-box 개발 공식 발표가 아니었나 생각한다.
이미 수많은 유저가 존재하고 용산전자상가에 형성된 암시장을 통해 활발한 거래가 이루어짐으로서 한국 사회의 젊은 층 사이에서는 콘솔기기에 대한 낮설음은 거의 존재하지 않았다. 본인이 고교에 재학 중이던 시기에 이미 아케이드 및 PC 이외의 게임을 자주 접하고 있는 학생들이 부지기수였고 만화책 다음으로 인기 있던 것이 게임정보지였다. 하지만 유저 및 관심을 가진 이는 많은데 그것을 당당하게끔 해 줄 만큼 사회 전반적인 인식은 아직 형성 되어 있지 않았던 상황이었다.
그런 와중에 터진 빌 게이츠의 콘솔업계 진출 의향은 충격적인 것이었다. 어린애들 장난감 즈음으로나 인식되었던 분야에 세계 최고의 자본가이자, 특히나 한국 사회 내부에서 명망 있고 유능한, 일종의 위인으로까지 받들어지던 그가 직접 콘솔 시장에 뛰어들겠다니. 물론 소니의 적극적인 한국시장 공략에 의한 여파나 온라인 게임의 성장과 활성화도 기여가 컸지만 빌 게이츠의 한마디가 고지식한 사람들의 인식을 바꾸는 데는 더 직접적인 영향을 끼쳤다고 생각한다.
여태껏 일본 내부의 업체들과 대결해 오던 형국과는 달리 이제는 여태까지는 없던 대결 양상이 나타내게 되었는데 첫째로는 IT산업의 거두와 가전산업의 거두의 대결, 둘째로는 일본 대 미국이라는 식의 구도로 변환된 것이다.
여기에서 한 가지 짚어보아야 할 점은 과연 ‘게임산업’이라는 것 자체가 그만큼 호황이고 앞으로 전도유망하기 때문에 이런 일이 발생했는가 하는 점이다. 사실 국내의 오락실은 사양길로 접어든지 오래되었고 그 나마의 명맥 또한 여태까지의 아케이드 기기에 의한 것이 아니라 DDR 혹은 EZ2DJ같은 독특하고 별난 기기들에 의해 유지되고 있었던 상황이었다. 이미 콘솔의 장르 다양화와 기능 발달은 아케이드를 압도하기에 충분하였고, 굳이 동전을 넣고 오락실에 가서 게임을 할 필요가 없을 만큼 PC를 기반으로 하는 온라인 게임이 이미 시장을 거의 장악한 마당에, 이제야 콘솔업체에 뛰어든다는 것은 어딘가 어폐가 있어 보이지 않는가. 당시는 충분히 그렇게 보여 질 상황이었고 표면적으로는 그렇게 밖에 볼 수 없었다. 게다가 90년 중반부터 말기까지 게임업계는 불황에 허덕이던 상황이었기에 더더욱 그러하였다.
하지만 X-box의 스펙이 공개됨에 따라 그러한 의문은 완전히 풀리게 되는데, MS사의 X-box는 겉모습은 콘솔기기의 형태를 하고 있지만 그 내부는 최신형 PC나 다름없는 형태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소니의 PS2가 온라인 서비스를 염두한 듯 한 낌새가 보이자 일본 최대의 케이블 TV회사인 TITUS를 1000억엔에 매입해 버린다. 소니와 MS의 싸움은 기판의 개발 이전에 통신망을 두고 벌어진 것이다.
MS가 콘솔업계에 진출한 것은 결국 엔터테인먼트 산업의 가능성 그 자체라기보다는 IT업계의 PC 기반의 사업으로는 가정 침투에 한계가 있음을 알고, TV와 친근하면서 PC 역할을 할 어떤 것에 대한 물색을 하던 중 가장 적합한 것이 콘솔이었기 때문인 것이었다.
즉, MS는 차기 산업의 중요한 열쇠로서, 그리고 가정에 자사의 네트워크를 연결하고 깊숙한 곳 까지 침투하여 일종의 지배력을 갖기 위한 최적의 수단으로서 X-box를 개발한 것이다. X-box의 내부 구조와, 비교적 최근에 발매된 동사의 윈도XP같은 경우 이전까지보다 홈 네트워크 시스템을 강조하여 만들어 진 것 등으로 미뤄보아 MS가 X-box에 맡기고자 하는 역할에 대한 추측은 그다지 어려운 것이 아니었다.
현재까지는 우수한 홍보 노하우에 의해 소니의 PS2가 판매량에서 앞서고 있으나, 시류에 맞춰서 시도한 네트워크화(소니의 PS2)와 네트워크화의 첨병으로서 사용하기 위해 만들어낸 기판(MS의 X-box)은 그 장래성에서 어느 쪽이 더 우세할지는 그다지 고민하지 않아도 될 듯 하다. 물론 그 기능은 게임을 즐기기에 충분하기만 하면 된다는 대대로 내려오던 일본 업계의 상식이나, 스펙이 더 뛰어날수록 필패한다는 경험적인 측면도 무시할 수는 없겠으나 이전까지 소니가 상대해 온 기업들과는 달리 MS는 몹시 구체적이고, 필요에 의한 수단으로서 콘솔을 채택함에 따라 이전보다 훨씬 만만치 않을 뿐더러 장래에 대한 청사진 또한 너무나도 뚜렷하기 때문에 쉬이 물러서지도 않을 듯 하다. 게다가 아무래도 90년대에 중시되었던 CD-ROM 방식이 소니와 닌텐도의 경쟁에서 소니 측이 태생적으로 유리할 수밖에 없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최근에 대두되는 네트워크화의 조짐은 그 누구보다도 MS에게 있어선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조건인 것이다.
소니가 가만히 쳐다만 보고 있을 리가 없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소니는 일본의 통신업체 NTT와 함께 i모드 서비스 연계를 가시화하고 있으며 소니를 통해 발매된 소프트 FF7의 캐릭터를 내세워 만든 3D 동영상(FF7 Advanced children)에서 NTT의 차기 제품을 작품 속의 주인공이 사용하는 식으로 의도적인 홍보를 함으로서 양측의 관계를 돈독히 하고 있다. 또한 NTT의 제품을 소형 단말기화 해서 소니와 관련된 콘솔 외에도 게임센터의 아케이드 기판과도 연계시켜 게임 결과 및 랭킹을 집계하게끔 할 계획이다.
또한 국내에서도 얼마 전에 그 위력을 실감할 수 있었던 소니의 대 동아시아 전략은 상당히 효과적인 것이었다. 그것은 다름 아니라 용산전자상가를 중심으로 난립해 있는 불법 소매상들의 지배력을 송두리째 뽑고 한국에 진출한 소니코리아(SCEK)에 무게를 실어주기 위해 콘솔 자체의 가격을 시중에서 매매되던 것보다 훨씬 저렴한 24만 8천원으로 대폭 인하시킨 것 이었다.
본래 소프트웨어 판매로 운영되는 마을의 소매상과 달리 용산전자상가는 환차익에 양도이익을 얹고, 정보가 부족한 사람들을 대상으로 또 한번 부당이익을 취하는 방식으로 여태까지 장사를 해 왔다. 게다가 불량품이나 파손된 제품을 저가의 대만제 복제품으로 속여 판매하는 경우도 흔했는데, 카트리지 시절 소위 대만제 복제품이란 명목으로 돌아다니던 저가의 케이스 없던 제품들은 사실 그 생산 특성상 대량으로 발생할 수밖에 없는, 일본 본사에서는 전량 처분하라는 명령이 내려오는 불량 카트리지였던 것이다.
소니 한국지부가 생겨나고 적극적인 공세가 이루어짐에 따라, 기판 자체로 인한 구매자들의 피해는 많이 사라지는 등 긍정적인 효과를 보였다. 또한 용산전자상가의 상권 구조에도 지각변동이 있었는데,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그 많던 소매상들이 게임 소프트만의 판매로는 대부분 영업이 곤란해져 사라지든가 핸드폰 판매 대리점으로 업종을 바꾸게 된 것이었다. 이러한 정리 과정은 그다지 오랜 시간이 걸리지도 않았으며 어떠한 마찰도 없었다. 또한 소니는 이전과는 달리 국민적 거부감(아마 90년대 초반만 해도 이런 일이 있었으면 많은 비난을 받았을 것이다)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었다.
하지만 SCEK의 앞날이 밝다고 장담할 수만은 없다. 이전의 닌텐도식 영업, 즉 하드웨어를 저렴하게 판매하고 그 대신 소프트웨어의 수익을 중시하는 식의 구조에는 한 가지 명제가 반드시 성립되어야 하는데,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소프트웨어의 수요가 항상 충분해야 한다는 점이다. 한국의 경우 다행스럽게도 그 수요는 많으나 정작 SCEK 및 SCE를 통해 공급되는 소프트를 사지 않는다는데 큰 문제점이 있다. 소위 서민CD로 일컬어지는 5000 ~ 15000원 정도 가격의 복제CD가 전국적으로 일반화 되어 있으며 대다수의 유저들은 여전히 정품의 필요성을 못 느끼고 있는데다, DVD Writer를 소유한 유저의 경우는 직접 인터넷을 통해 전 세계적으로 불법 공유되고 있는 PS2의 롬을 다운받아 DVD로 구워서 사용하면 그만인 것이었다. SCEK는 일어로 제작된 소프트를 한글화 하고 저가에 판매하는 등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지만 아직까지 이 문제는 좀처럼 해결될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다.
MS와 소니의 홈 네트워크에 대응은 각각의 태생에 따라 또한 틀린 전략을 띄고 있는데, MS의 경우는 홈 네트워킹의 허브로서 PC를, 홈 엔터테인먼트의 중심으로서 X-box를 상정하고 양측을 하나로 묶어 미래에 대응하는 식의 전략을 택하고 있다. PC가 점차 중시될 것은 눈앞의 불 보듯 뻔한 일이고 그에 따라 X-box의 역할은 PC의 한계를 보완하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홈 네트워크의 지배에 있어서 일종의 보험과도 같은 역할을 맡음으로서 두 가지의 가능성에 대한 동시 대비 및 지지 않는 승부를 위해 마련된 카드라고 할 수 있다.
소니 역시 UVN(유비쿼터스 밸류 네트워크) 또는 COCOON 프로젝트로 대응을 하고 있는데 UVN은 가전업체인 소니의 특성을 살려, 소니가 생산하는 모든 정보, 가전기기의 소프트, 하드웨어를 네트워크에 연결하는 개념이다. 즉, 예를 들자면 음악파일 하나를 TV, 컴퓨터, CD플레이어, 게임기 등 모든 소니의 하드웨어에서 공유하는 것이다.
COCOON은 위의 UVN으로 모인 정보, 가전기기를 연동하는 것으로서 원격제어보다 홈 엔터테인먼트에 초점을 둔다. 따라서 노트북PC, 가정용 게임기, 디지털TV, 휴대전화기를 4대 핵심제품군으로 삼고 영화, 게임, 음악, 방송, 나아가 금융 및 결제까지 이어지는 토털서비스를 계획하고 있으며, 그 중에서도 PS를 홈 네트워킹 및 홈 엔터테인먼트를 위한 홈 서버로 활용하겠다는 계획을 세우고 있다. 벌써 3000만대가 보급된 PS2를 활용하면 이미 구비한 가정에선 그다지 추가비용이 들지 않아 좋고, 이는 소니에게 또한 편한 일이 된다.
소니는 X-Box와는 달리 내부에 통신시스템이 없는 관계로 브로드밴드 유닛을 따로 구입해야 하는데, 이는 2002년부터 서비스를 시작하였다. 네트워크화의 필요성에 따라 일본 내 주요 통신, 네트워크 회사와 제휴를 이미 마쳤으며 이를 통해 PC 게임의 장점이었던 게임의 지속적인 패치발표 및 그로 인한 보완이 가능해짐은 물론 인스턴트 메시지를 통한 쌍방향 통신이 원활해졌으며 비디오 스트리밍 및 이메일 확인 등의 PC적 기능 또한 추가되었다.
게다가 소니는 2005년경에 출시될 차기작 PS3의 개발에 벌써 착수하였는데 그 중심에 놓이게 될 것이 바로 ‘셀’이라는 차세대 마이크로프로세서이다. IBM, 도시바 등과 합작으로 개발을 시작한 셀의 처리능력은 펜티업 4급 프로세서의 100배 이상이라고 하니 만일 이것이 현실화 된다면 PS3의 쌍방향성은 대폭 증가하게 될 것이며, 이는 PS3가 그저 콘솔기기가 아닌 멀티미디어 셋톱박스 또는 사무용 기기로까지도 사용 될 가능성이 충분함을 암시하고 있다. 게다가 취약점이었던 네트워크 환경에 대한 적응성 또한 보완되어 이번에는 아예 초고속 네트워크 환경의 홈 서버용으로 설계된다고 하며, 개발된 칩(셀)은 각 회사가 따로따로 사용함으로서 호환성을 높일 계획인 듯하다.
이와 같이 점차적으로 콘솔의 입지는 어린 아이들이 갖고 노는 비싼 장난감의 그것이 아니게 되었다. 인터넷 발달의 주 원인이었던 쌍방향성이 콘솔에서도 완벽하게 적용된다면 어떠한 모습을 띄게 될까. 한국사회만 해도 더 이상 인터넷 유희문화는 TV에 비해 뒤떨어지지 않으며 오히려 쌍방향성의 유리함 덕에 점차 그 영역을 넓혀가고 있는 중이다. 또한 그것의 역할은 우리의 생각보다 몹시 커서 정치적 경제적 문화적으로 많은 파장을 불러왔다. 이러한 역할마저도 앞으로 몇 년 내에 콘솔을 통해 가능해질까. 과연 가정용 정보단말기로서, 홈 네트워크의 허브로서 콘솔이 네트워크 시대의 중심이 되는 날이 올 것인가.
어린 아이들의 손에서 오고가던 흑백화면의 액정 속에서, 그것도 같은 동작만을 반복하던 완구에 지나지 않던 것이 어느덧 네트워크의 중심으로 다가서고 있다. 향후 유비쿼터스 시대가 도래함에 따라 네트워크의 접근성이 용이해지고 수많은 발달된 컨텐츠들이 쏟아져 나올 때, 과연 현재 ‘게임기’라고 우리가 부르고 있는 것이 이 때에도 같은 의미로 사용될는지는 궁금한 일이다.
이미 PC의 역할 중 적지 않은 부분이 가능해진 콘솔이 그 때쯤 가면 과연 어떤 형태로 어떤 역할을 수행하고 있을까. 그리고 과연 그러한 것들은 가정의 안방 안에서만 이루어지고 있을까. 오랜 시간을 콘솔과 함께 해 온 본인으로서는 몹시 기대되는 일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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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y | 2008/01/21 22:42 | 잡동사니 | 트랙백 | 덧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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